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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 건강

의식적 자기 암시로 하는 자기 통제 _ 에밀 쿠에

by giornata 2024. 8. 31.

의식적 자아는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반면, 무의식적 자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까지 완벽하게 기록하고 기억한다. 무의식적 자아는 '판단'하지 않고 그대도 받아들이며, 신체의 모든 기능을 조정하는 뇌와 연관이 있다.

무의식적 자아는 행동도 지배한다. 이러한 무의식의 작용을 '상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상상은 의지에 반하여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의지와 상상은 반작용 관계다.

 

의지와 상상, 그리고 자기암시

  자기암시는 인간의 선천적인 능력이며, 신비롭고 무한한 힘을 갖고 있다. 이 힘은 상황에 따라 최상 혹은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이해는 모두에게 유용하며, 특히 의료인, 법조인, 교육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자기암시를 올바르게 하면 무엇보다 잘못된 자기암시로 인해 남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또한 육체적으로 건강해짐은 물론, 신경증 환자나 무의식적·내적 자기암시의 희생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잘못된 길을 택한 이들을 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다.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아

  우리의 내면에는 서로 다른 두 자아가 있다. 두 자아는 모두 지적인데, 하나는 의식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의식할 수 없다. 그중 무의식적 자아는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문제시되는 특정한 현상이 나타날 때는 분명히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예를 살펴보자.

  의식적 자아는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반면, 무의식적 자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까지 완벽하게 기록하고 기억한다. 무의식적 자아는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신체의 모든 기능을 조정하는 뇌와 연관이 있다. 이 때문에 다소 기이한 결과가 나타난다. 즉, 우리가 신체의 어느 부위가 좋거나 나쁘다고 믿거나, 혹은 그런 느낌을 갖는다면, 그 신체 부위는 실제로 그렇게 기능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적 자아는 행동도 지배한다. 이러한 무의식의 작용을 ‘상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상상은 의지에 반하여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의지와 상상은 반작용 관계다.

 

의지와 상상

  사전에서 ‘의지’라는 단어를 찾으면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의식적인 행동을 하게 하는 내적 욕구’라고 쓰여 있다. 이 뜻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사실 이것처럼 잘못된 말은 없다. 실제로도 ‘의지’는 ‘상상’에 자리를 내주며, 이는 예외 없이 절대적인 규칙이다.

  바닥에 폭이 30cm, 길이가 10m인 널빤지를 놓는다고 가정해보자. 누구든 널빤지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무리 없이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조건을 바꿔서 널빤지가 대성당의 탑만큼 높은 곳에 걸려 있다고 상상해보자. 과연 누가 이 좁은 다리 위를 걸어갈 수 있을까? 아마 아무도 못할 것이다. 두 걸음도 내딛기 전에 다리가 후들거려서 아무리 용기를 낸다 해도 결국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왜 널빤지가 땅에 놓여 있으면 떨어지지 않고, 높은 곳에 걸려 있으면 떨어지는가? 앞의 경우는 다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쉽다고 ‘상상’하고, 뒤의 경우는 할 수 없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현기증은 마음속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그리기 때문에 생기는 증상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상은 곧 현실로 이어진다. 노력하면 할수록 바랐던 것과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잠을 자려고 억지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잠이 들 것이다. 하지만 자려고 애쓴다면 오히려 잠들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떨어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
  ‘잠들고 싶은데 잠이 안 와.’
  ‘이름을 떠올리고 싶은데 생각이 안 나.’
  ‘장애물을 피하고 싶지만 할 수 없어.’
  ‘웃음을 참고 싶지만 안 돼.’
  이처럼 어떤 갈등 상황에서든 상상은 의지를 꺾고 승리한다.

  어느 이야기책에 나오는 빠누르라는 악당은 다른 이의 전례를 따르는 상상이 전염성이 강하다는 사실과 그것의 결과를 잘 간파했다. 그는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상인에게 복수를 하고자 자기의 커다란 양 한 마리를 바다 속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상인의 양들도 모두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양들의 이런 특성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도 양들과 비슷하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미루어 짐작하여 무심결에 다른 사람들의 전례를 그대로 따른다. 상상, 즉 의지와 다투는 무의식이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범죄자들 중에는 뜻하지 않게 죄를 저지른 경우가 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물으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뭔가 강한 힘이 그러라고 시켰어요.”라고 대답한다.
  알코올 중독자나 범죄자들의 대답은 거짓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힘에 밀려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즉, 자신의 행동을 막을 수 없다고 ‘상상’한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의지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의지란 상상에 끌려 다니는 불쌍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상상을 다루는 법을 터득했을 때 비로소 이러한 꼭두각시놀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암시와 자기 암시

  상상이란 뭍으로 빠져나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휩쓸리고 마는 급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빠져나오는 게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이 급류도 물길을 발전소로 돌리면 생활에 유익한 전기와 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상상은 ‘집에 갇힌 미친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재갈도 고삐도 없는 야생마와 같다. 이 말 등에 올라탄 기수는 그저 말이 달리는 대로 갈 수밖에 없다. 제멋대로 달리던 말은 결국 도랑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다. 그러나 기수가 말에 고삐를 채우고 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말은 기수가 모는 쪽으로 순순히 따르게 된다.

  이제 우리는 상상 혹은 무의식이 어마어마한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부터 상상과 무의식도 급류나 야생마처럼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에 앞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두 단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암시와 자기암시다.
  
  암시란 무엇일까?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두뇌에 생각을 주입시키는 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용이 실제로 일어날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암시는 그 자체로 있을 수 없다. 암시가 존재하려면 자기암시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기암시는 ‘스스로에게 생각을 주입시키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암시를 걸어도 상대의 무의식이 암시를 받아들여 자기암시로 전환하지 않으면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나는 때때로 평범한 주제의 암시를 스스로에게 거는 데 실패했다. 그 이유는 내 무의식이 암시를 거부하여 자기암시로 전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암시의 사용

  상상도 급류나 야생마처럼 통제할 수 있다고 얘기한 앞의 주제로 다시 돌아가보자. 상상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첫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 즉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둘째, 상상의 통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야 한다.

  그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는 바라거나 인삭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방법을 쓰고 있다. 하지만 종종 잘 못 사용하여 상처를 입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암시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무의식적으로 자기암시를 걸어왔다. 하지만 정작 해야 할 일은 의식적으로 암시를 거는 일이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암시의 대상을 마음에 명확히 새긴다. 그 대상이 '예' 혹은 '아니오'라는 대답을 요구하면, 다른 생각은 일체 떠올리지 않고 '이것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등의 흐름에 집중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내부 에너지의 일부다. 만일 무의식이 이러한 암시를 받아들여 자기암시로 전환하면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현실이 된다.

  지금까지 자기암시는 최면술 같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미치는 상상의 영향'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이 영향력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만일 당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 반대로 누구나 쉽다고 여기는 일이라도 당신이 할 수 없다고 믿는다면 결코 해내지 못한다. 낮은 언덕을 오르기 힘든 높은 산처럼 느끼고 못 넘는 것이다.

  신경쇠약도 이와 같다.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몇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도 힘들어한다. 그러고는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쓸수록 더 깊이 빠지는 것처럼 더욱 위축되고 만다.

  통증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정말 조금씩 사라지는 걸 느끼지만, 반대로 괴로워하면 더 큰 통증이 뒤따른다. 어떤 이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두통이 생길 거라고 미리 짐작하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그 상황에서 두통이 생긴다. 병을 자초하는 셈이다. 이것은 의식적 자기암시로 병을 치료하는 것과 반대 현상이다.

  일반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생각을 밀어붙이는 사람을 일컬어 ‘미쳤다’고 한다. 정신적, 육체적 질병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질병이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특별한 외상이나 장애가 없는데 마비 증세를 보이는 사람은 자기가 마비되었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치료법이 요구된다.

  행복한지 불행한지의 여부도 상상에서 비롯된다. 똑같은 상황에 처했는데도 어떤 사람은 행복하다고 느끼고, 어떤 사람은 처절하게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신경쇠약, 말더듬이, 혐오증, 도벽, 마비 증세는 무의식적인 자기암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무의식이 육체와 정신에 작용하여 나타난 결과다. 이처럼 무의식은 수많은 질병의 원인이므로, 이것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 특히 신체 장기에 무의식이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당신이 지금 조용한 방에 혼자 있다고 상상해보자. 안락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으라. 그리고 의식을 집중하면서 ‘이런저런 일들이 사라질 것이다.’ 혹은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생각해보라. 만약 자기암시가 제대로 걸려 무의식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놀랍게도 생각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다. 자기암시로 바뀐 생각들은 내면에 존재하며, 그것의 효과가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자기암시를 시행할 때는 의지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의지와 상상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저런 일들을 할 것이다.’라는 의지가 들면 상상은 ‘그렇게 하려고 해도 안 될걸.’ 하고 반대한다. 그러면 원하는 것을 얻기는커녕 정반대의 결과를 얻게 된다. 이것이 정신 질환의 치료를 위해 의지를 되새기는 방법을 써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다.

  중요한 것은 상상을 훈련시키는 일이다. 나는 상상 훈련법을 통해 다른 치료법이 소용없었던 사람들과 중증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다.

  내가 지난 20년간 수많은 실험을 거쳐 도출한 방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의지와 상상이 상반되면 예외 없이 상상이 승리한다.
  2. 의지와 상상이 갈등을 빚으면 상상의 힘은 의지의 제곱비로 커진다.
  3. 의지와 상상이 일치하면 상상의 힘은 둘을 더한 만큼이 아니라, 곱한 만큼 커진다.
  4. 상상은 통제할 수 있다.
  (‘제곱비’와 ‘곱한다’는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쓴 표현이다.)

  위의 방법에 따르면 질병에 걸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진실이다. 어떤 질병이든 자기암시로 나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을 수 있다’는 뜻이지 ‘모두 낫는다’는 뜻은 아니므로, 차이를 잘 이해해야 된다.

  의식적 자기암시를 하려면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피아노 치는 법을 배우듯이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자기암시는 인간의 천부적인 재능이며, 어린아이가 끊임없이 재잘거리듯 일생 동안 무의식적으로 쉼 없이 다루는 도구다. 그렇지만 만일 무의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당신은 해를 입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반대로 이 도구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면 위험에 처한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이솝이야기에서도 ‘혀’를 두고 ‘가장 좋으면서도 가장 나쁜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부터 모든 사람들이 의식적인 자기암시를 이용하면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사실 ‘모든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의식적인 자기암시가 잘 되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 발달이 미흡해서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과 아예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기암시 시행 방법 

  원칙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없다.’
  ‘설사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해도 병렬로 존재하며 겹치지 않는다.’

  정신을 통해 걸러지는 모든 생각은 현실이 되고 행동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어떤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병이 점점 나아진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면 병은 정말 사라질 것이다. 또 도벽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더 이상 훔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한다면 증세가 사라질 것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훈련은 사실 아주 간단한 것이다. 환자들의 무의식적 사고를 A, B, C 단계로 나누고, 그 단계에 따라 가르치면 된다. 자기암시가 잘 되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음에서 제시하는 단계를 거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1단계

몸을 꼿꼿하게 세운 다음, 발끝에서 발꿈치까지 바닥에 붙이고 발목은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한다. 몸 전체가 바닥에 균형을 잡고 세운 나무판이라 상상하게 한다. 나무판을 살짝 밀면 판 전체가 아무 저항 없이 민 방향으로 쓰러지는 것처럼, 피시술자의 어깨를 뒤로 당기면서 저항 없이 시술자 쪽으로 넘어지라고 말한다. 이때 발은 바닥에 대고 있어야 한다. 잘 되지 않으면 성공할 때까지 계속한다.

 

 2단계

상상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설명하면서 피시술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생각하게 한다. “뒤로 쓰러진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이 생각에만 집중하게 한다. 이때 피시술자는 쓰러질지 쓰러지지 않을지 의심을 품지 않아야 하며, 시술자를 위해 의도적으로 쓰러져서도 안 된다. 만약 무언가가 뒤로 쓰러지게 시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저항하지 말고 힘이 느껴지는 대로 따른다.

  이제 피시술자에게 고개를 들고 눈을 감으라고 한다. 오른손을 목 뒤에 얹고, 왼손은 이마에 올리게 한다. 그리고 “자, 생각하세요. 나는 뒤로 쓰러집니다. 뒤로 쓰러집니다.”라고 말한 후, “당신은 뒤로 쓰러집니다. 당신은 뒤로 쓰러집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러면서 피시술자의 왼손을 관자놀이로 살짝 미끄러지게 내리고 오른손은 목에서 천천히 뗀다.

  그러면 피시술자는 몸이 뒤로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며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뒤로 완전히 쓰러질 것이다. 만약 쓰러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당신은 쓰러지면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나무판처럼 쓰러졌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명령조로 말하며 성공할 때까지 계속한다.

  이때 시술자는 왼발과 오른발을 벌린 안정된 자세로 피시술자 뒤에 서서 쓰러질 때 잘 받도록 한다. 피시술자가 무겁더라도 같이 쓰러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3단계

 이번에는 시술자가 피시술자 앞에 서서 바라보게 한 다음,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발목은 움직이되 두 발을 일자로 붙이게 한다. 그리고 시술자는 양손을 피시술자의 관자놀이에 얹은 후, 눈꺼풀을 깜박이지 않고 시선을 피시술자의 코끝에 둔다. 피시술자에게 “나는 앞으로 쓰러진다. 앞으로 쓰러진다.”라고 생각하게 하고, 힘주어 말한다.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당신은 앞으로 쓰러집니다.”를 반복해서 말한다.  


4단계

피시술자에게 손가락이 떨릴 정도로 아주 세게 양손을 포개어 쥐라고 한다. 시술자는 전 단계와 같이 시선을 고정하고 피시술자의 손을 감싸 더 세게 쥐게 한다. 그리고 피시술자에게 손을 뗄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다음에 셋까지 세는데, 셋을 셀 때 피시술자에게 손을 떼라고 지시한다. 이때 피시술자는 계속 ‘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손을 뗄 수 없다.

  다시 ‘하나, 둘, 셋’을 천천히 세며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줘서 말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다.”

  피시술자가 할 수 없다고 믿으면 정말 손을 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양손은 강하게 밀착된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하면 양손은 떨어진다.

  시술자는 피시술자의 코끝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피시술자가 시선을 돌리지 않게 해야 한다. 만일 피시술자의 손이 떨어지면 시술자의 잘못이 아니라, 피시술자가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피시술자에게 실패의 원인을 설명하고 다시 시작한다. 또한 말할 때는 피시술자가 잘 따르도록 명령조로 지시해야 한다. 목소리를 크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를 힘 있게 강조하라는 뜻이다. 이 단계가 성공하면 다른 실험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몇몇 피시술자들은 매우 민감해서 어렵지 않게 손과 발에 암시가 걸린다. 두세 가지 실험을 쉽게 성공하면 더 이상 피시술자들에게 “이것을 생각하세요.” 혹은 “저것을 생각하세요.”라고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다. 단지 명령조로 “주먹을 쥡니다.”, “이제 손을 펴지 못합니다.”, “눈을 감습니다.”, “이제 눈을 뜨지 못합니다.”라고만 해도 된다. 그러면 민감한 피시술자는 즉시 손을 펴거나 눈을 뜨지 못한다. 몇 분 후에 피시술자에게 “이제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바로 손을 펴고 눈을 뜬다.

 

  이런 실험은 변형이 무한히 가능하다. 피시술자에게 두 손을 잡고 양손이 붙었다고 상상하게 할 수도 있고, 테이블 위에 손을 놓게 한 후 손이 붙었다고 암시를 걸 수도 있다. 또 의지에 붙어 일어날 수 없다고 상상하게 하거다, 책상 위에 세워 둔 연필꽂이가 아주 무겁다고 상상하게 해서 못 들게 만들 수도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모두 암시가 아니라, 시술자의 암시를 받아들인 피시술자의 자기암시에서 기인한 것이다.